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저작 === >나는 빠른 손과 정확한 기억력을 갖고 있습니다. 글을 쓸 때면 글이 거침없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글을 짜낼 필요가 없습니다. 루터는 엄청나게 많은 저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저술 양이 성경 번역에서부터 종교개혁 이후 평균 매일 5페이지, 연간 1,800페이지씩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1523년에는 독일 전체에서 편찬된 출판물이 900여편이었는데 그중 346편이 루터의 저작일 정도였다. 또한 '''생전 혼자서 독일 내 모든 가톨릭 저작자의 저술의 5배를 썼다!''' 그중에 성경 번역은 루터 저작 중 최대 업적으로 불릴 만한데, 이 언어학적 성과가 현대 독일어의 기반을 닦았다. 후대 독일 내 가톨릭 학자들이 루터를 비판할 때조차도 루터의 언어로 생각하고, 루터의 언어로 반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 정도로 독일어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루터 이전에도 고지독일어판 성경이 14본, 저지독일어판 성경이 4본 있었지만 라틴어판 [[불가타]] 성경의 원본을 해치지 않을 의도로 거의 그대로 직역한데다가 따라서 문장도 꼬여서 이해하기 어려운 편이었다. 루터는 불가타를 바탕으로 하되 [[히브리어]] 사본과 [[그리스어]] 사본을 대조하면서 민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단어를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루터는 번역을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는 표현을 거부하는데. 민중들이 어떤 말을 쓰는지 관찰하고 그것이 가진 뜻으로 옮겨야 된다는 것. 지식인들이야 라틴어나 그리스어 단어를 이해하겠지만 글을 모르는 이들[* 또는 독일어만 간신히 알아들을 학식의 수준의 이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집안의 어머니가 하는 말과 시장 바닥의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말, 쓰는 말, [[상인]]들이 경제 활동을 하는 말을 관찰하며 길게는 한 단어를 찾으려 3~4주씩이나 고민했다고 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직업 전문 용어를 번역하기 위해 실제로 [[푸줏간]]서 [[백정]]과 [[대장장이]]나 새잡이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평민들이 실제 생활에 쓰는 단어를 바탕으로 당시 독일어에는 없었던 단어를 새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대표적으로 루터는 앞서 불가타본의 난해한 번역 중 하나로 기존 불가타본의 독일어 번역은 "사슴이 맑은 물을 달라고 울부짖음과 같이" 같은 어색한 표현을 '''독일 남아가 누가 그렇게 말하냐!'''라고 비판했는데 이런 표현을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식으로 번역했다. 직독직해의 한계상 라틴어 같은 로망스계 언어와 게르만어의 구조상 차이 때문에 단어=단어의 이식은 라틴어 특유의 문학성도 이미 죽어버린 데다가 중의적 의미를 살리기 어렵다고 보고 아예 새로운 번역을 시도한 것이다. 그렇다고 루터의 성경이 민중들의 구어만을 수록한 것은 아니다. 루터는 스스로 문체를 작센 선제후 궁정의 [[공문서]]에 쓰이는 필법을 따랐다고 밝혔다. 이런 격식은 [[표준 독일어]]의 형식의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루터의 거주지 작센 지방은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의 경계점으로 루터와 그 부근 사람들은 두 언어를 알아 들을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차용하고 일부는 소개하는 식으로 두 언어의 통합을 이뤘다. 결국 이 과정에서 루터는 온갖 게르만 방언의 집합소에 불과했던 게르만어를 독일어로 정리해낸 것이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발매되자마자 엄청나게 팔려서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나중에 번역된 저지독일어 판까지 합쳐서 살아생전 100만부가 팔렸다. 당시 식자층 인구와 구매력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이다. 1500년경 신성로마제국 인구는 1600만 독일어권은 900만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식자층은 10%~15% 정도로 살만한 사람은 다 샀다는 것. 루터의 지지자는 물론 루터의 적대자조차 궁금해서 다 사봤다고 한다. [[저작권]]의 개념도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당연히 만연했던 무허가판이나 복사판을 뺀 수치다. [[불가타]]판 필사본이 500굴덴, 기존의 고지독일어 판이 10굴덴인거에 비하면 1.5굴덴에 팔린 영향도 있다. 그렇다고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성경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뿐만 아니라 팜플렛은 200만부가 팔렸는데, 이런 종교개혁 저작들은 급속도로 퍼지면서 독일 내 종교개혁의 성패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어 성경의 영향은 제국의 국경을 넘어 멀리 퍼졌다. [[네덜란드]]와 [[스웨덴]], [[아이슬란드]]와 [[덴마크]] 등지의 성경에 직접적인 자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나라들에서도 그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 성경이 영어 성경 번역가에게 인상을 남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종교개혁 운동의 일원중의 하나,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 ~ 1536)은 루터가 독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할 무렵 잉글랜드에서 피신해 유럽 대륙으로 건너왔다. 그 역시 원어 사본을 놓고 성경을 번역했는데, 아마도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와 만났던 것 같다. 틴들에게 강렬하게 영향을 준 루터의 업적 중 한 가지는 신약 성경의 배열 순서였다. 이전의 성경전서들에는 성경을 배열하는 표준이 없었다. 번역자들이 임의로 순서를 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가르치셨나를 기준으로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와 [[사도행전]], 서신서(구세주가 드러나는 강도에 따라 순서를 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순으로 성경을 배열했다. 틴들은 루터가 정한 이 순서를 따랐으며, 이후로 사실상 모든 성경 번역자들이 동일한 순서를 따랐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구절들이 루터에게서 틴들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나오는 육에 속한 사람(natural man)에 나오는, 틴이 쓴 'natural'은 루터의 독일어 성경의 'natürlich'에서 왔다. [[마태복음]] 2장 18절의 소리가 들리니(was a voice heard)는 루터가 쓴 'auf dem gebirge'(산에서의 외침/편주)라는 표현에서 왔다. 틴은 요한복음 19장 17절의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the place of dead men's skulls)과 [[고린도후서]] 6장 12절의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Ye vex yourselves off a true meaning), [[디모데전서]] 1장 7절의 율법의 선생(Doctors in the Scripture)과 마태복음 21장 15절의 [[호산나]](hosianna)라는 표현도 <루터역 성경>에서 옮겼다. 저작이 아닌 출판물 중에 그의 설교는 루터가 초반에는 원고를 썼으나 곧 매번 즉흥적으로 해서 자작으로 남은 것은 거의 없고, 청중들이 들은걸 복원해서 3,000여개중 2,000여개가 전한다고 한다. 에라스뮈스나 츠빙글리 같은 인물들과 서신으로 논쟁을 했고 현재도 연구에 쓰이는데 '''루터는 편지를 잘 보관 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연구자들이 현재에도 애를 먹고 있다. 노래 가사에도 갑툭튀한 재능을 드러냈는데 나이 40살이 넘어서 42곡을 작사했다. 이중에 36곡은 개신교 찬송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전부 '''단 1년 사이에 다 쓴 것이다.''' 그중에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은 아직도 개신교 찬송가에서 유명곡이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릴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 >마르틴 루터 작사,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원 가사는 4절짜리인데, 우리말 가사는 원곡의 3, 4절을 합쳐서 3절을 만든 것이다.] 루터는 많은 저작을 남겼지만 저작에는 별 미련이 없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자신의 저작을 평가해보라는 질문에 ≪대소교리문답≫, ≪노예 의지론≫ 2개만 있으면 다른 건 다 태워 없어져 버려도 된다란 말을 남겼고, "책에 충분히 쓰긴 했다만 모든 것이 다 감동을 주긴 어려울 것"이라며 미련 없이 썼지만 사람들이 이걸 보고 바뀔지는 별 기대 안 한다는 투로 말을 남겼다. 루터의 전집은 탄생 400년 기념으로 1887년 출판된 바이마르본이 가장 유명한데, 약 100여권 분량이라고 한다. 현재 한국어로도 번역이 진행 중인데, 남은 것만 두꺼운 책으로 75권 정도로 예상한다고. 루터가 자신의 역작이라고 꼽은 ≪노예의지론≫은 에라스뮈스의 자유의지론에 논박하여 1525년 쓴 것인데, 5년 전 1520년 발표한 초기 3대 저작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와 이어지는 논리 구조이다. 제목만 들으면 '우린 노예처럼 닥치고 믿으라 된다'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데, 루터 핵심 사상인 이신칭의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이중명제인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하여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Christianus homo omnium dominus est liberrismus, nulli subiectus) >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Christinus homo omnium servus est offciosissimus, omnibus subiectus) 의 두 모순된 논제의 [[변증법]]적 발전이다. 한편 이신칭의는 역시 잘 모르는 측에서 선행을 할 필요없다는 투로 비난하는데 루터는 선행을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기존 가톨릭교회에서 보속을 바라는 선행은 진정한 선행이 아니고, 선행은 어디까지나 '이웃 사랑의 결과'로 나와야 된다고 한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사람은 선행을 할 수밖에 없다. 이를 거슬러 가보면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의롭지도 않고 진정한 믿음도 없다는 뜻이다. 결국 구원론과 선행을 분리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에라스뮈스는 1524년 자유의지론을 발표하여 루터의 신학에 반박했다. 그에 다시 반박하여 1525년 노예 의지론을 발표한 것이다. 이 두 대가의 논쟁은 천년 전 교부시대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신인 협동설 논쟁의 연장으로[* 단 에라스뮈스가 펠라기우스 입장은 아니다. 펠라기우스, 반(半) 펠라기우스 주의는 가톨릭교회에서 예전에 이미 이단처리였고,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온건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이나 중세 후기 더 온건해졌고, 루터의 입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보다 더 강경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이다.] 현재까지도 자유의지 논쟁은 전체 기독교의 떡밥이다. 대략적인 소개는 [[예정설]] 항목으로. 자세한 건 역시 전문 서적을 참조 바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